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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생기념병원 (BONGSENG MEMORIAL HOSPITAL est. 1949) 전문센터/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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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이식센터

신장이식수기

봉생기념병원 신장이식 수술 1000례 기념 ‘희망+나눔 이야기 수기공모전’ 수상작을 소개합니다.

[참가상] 슬픔이 다가오는 길 - 이동섭 님

201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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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월 2일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 유학을 마치고 창원이라는 낯선 곳에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을 발령받았다.

 

너무도 젊은 마음에 추운 겨울이지만 바깥의 낮은 온도를 뜨겁게 달구었고 이제야 부모님께 효도하고 아름다운 나의 여인과 결혼도 하고 사랑하는 애들도 있는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2년의 열애 끝에 아름다운 서울 아가씨인 나의 아내를 맞이했다. 아들 두 명을 낳고 세상이 너무 행복한 날만 보내었고 큰아들이 14살 중학교 1학년 작은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되고 나의 직장 생활도 무르익어 어느덧 회사 중간 간부가 되었다.

 

어느 날 회사에 근무 중 눈이 흐리게 보이고 얼굴도 좀 부었고 해서 가까운 안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께서 안압이 너무 높아 실핏줄이 터져 충혈이 심하다고 안과적인 치료보다 내과로 가 보라고 해서 곧장 근처에 있는 종합병원 S 병원 내과에서 소변과 혈액검사를 하고 결과를 보자 무슨 병인지 자세히 설명도 해주시고 인공신장실이라는 곳에 견학도 시켜주었다.

 

너무 늦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하늘이 무너졌다 부인과 나는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한동안 말이 없었고 이윽고 나의 눈에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그 눈물은 무얼까? 바깥에는 여름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부인과 자식 둘은 어린데 어떻게 해야 하나? 슬픔은 잠시고 아직은 내 나이 44살 이대로는 꺾일 수가 없다고 부인이 열심히 나의 병을 알아보고 뛰어다녔고 정녕 나 자신은 실의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지인의 소개로 부산 봉생 병원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자세한 설명과 함께 복막투석 치료가 시작되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존심과 인생 회한이 밀려온다. 창원과 부산을 오가며 치료받는 것은 부인의 피나는 노력과 인내 그 자체였다. 14년간 다니든 회사도 그만두게 되었다. 9개월간의 복막 투석 중에 한 콩팥 기증자의 희망의 소리가 들려왔다. 친척이 다니는 한 사찰의 스님이었다. 

 

1995년 3월 따뜻한 봄날 대구 영남대학교 병원에서 부인과 형제들의 큰 걱정을 뒤로하고 모든 검사를 마치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정을 위하여 마음의 기도를 했다. 편안한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천사가 나를 깨웠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유리관 속의 무균실이었다 정말 기다린 소변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 살았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열흘 후 부산 봉생병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주일간의 입원 후 퇴원하며 외래 진료를 하게 되었다. “제2의 인생을 잘 살아 보리라” 하고 하늘을 보고 소리 없이 외쳤다.

 

가정 경제를 위해 작은 사업을 꾸렸다. 마음속으로 가족의 그동안의 보상으로 열심히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업이 자리를 잡을 무렵 1997년 12월 IMF가 몰아쳐 그 여파가 나의 사업에도 휘몰아쳤다. 집과 재산이 경매와 은행 압류로 넘어가고 온 가족이 바깥으로 내 몰렸다. 작은 집으로 월세 이사하고 부인이 다니기 힘든 직장을 나갔다. 나의 몸과 마음이 흙탕물이 되고 만신창이 되었고 나 자신의 자존심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주유소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보았지만 가정에 큰 보탬이 되지 않고 병원비와 약값 교통비 등도 어려웠다. 이식 한지 15년쯤 몸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내 몸이 많이 무거웠다.

 

2011년 봄쯤 부인이 회사를 그만두고 조그마한 식당에 일을 했다. 극구 만류했지만 생활고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결정했다고 하였다. 3개월 후 부인이 단니던 식당을 인수하겠다고 했다. 마침 큰 아들의 도움으로 모든 재산과 은행 대출 등 합해도 미치지 못해 남은 금액은 6개월 할부로 갚기로 하고 영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장사가 잘 되었고 부부가 함께 열심히 힘을 합했다.

 

조금씩 은행 대출금을 갚아갈 무렵 2013년 이식한지 약 17년 3월 개월쯤 나의 콩팥 수명이 다 되어 봉생 병원에서 혈액 투석을 시작했다. 너무나 인생이 안타깝고 허무하고 짧았다. 또 내 마음도 너무 간사한 것 같았다. 생각보다는 오래 이식 콩팥을 사용했건만 더 욕심을 내고 있었다. 허 허 웃고 말았다.

혈액 투석한지 6개월쯤 나의 체력이 한계에 왔다. 투석과 식당 일을 함께 하다 보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편할 것 같았다. 내 마음을 또 한번 다스려 본다. 선생님께서 두 번째 이식을 권유했다. 귀가 번쩍했지만 내 나이가 몇인데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한번 등록이나 해보자 하고 상담실로 갔다. 상담 선생님의 좋은 말씀도 들었다. 희망을 갖고 그리고 등록도 했다. 

 

2013년 11월 29일 오후 4시경 상담 선생님으로부터 급하게 연락이 왔다. 뇌사자 콩팥 기증이 있는데 조건이 맞는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했고 가, 부를 물었다. 물론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 8시까지 연락이 갈수 있다고 했다. 희망을 갖고 기다리는데 가슴이 떨리고 밤새 한잠도 자지 못했다.

 

오전 8시쯤 병원에서 수술 및 입원 준비를 하고 오라고 연락이 왔다. 병원에 도착하자 바로 필요한 검사가 시작되고 오전 11시경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실로 향하는 마음은 떨리고 과연 내가 살아올 수 있을까. 만감이 교차했다. 잠시 후 수술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온몸이 아프고 몸이 너무 추웠다.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눈을 떠 보았다. 무균실 방이었다. 부인과 아들이 심각히 나를 쳐다보고 이름을 불렀다. 목이 아프고 기침이 심하게 나고 열이 조금 있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힘과 용기를 주었다. 과연 다시 내가 살아났을까? 마음속으로 나를 불러 보았다. 오랜만에 시원한 소변을 보았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 나이 64살 남은 인생은 부인을 위해 살고 싶었다. 남은 인생을 있게 해준 봉생 병원 이식팀 선생님들에게 정말 감사를 드리고 나에게 콩팥을 기증한 이름 없는 그분에게도 무한 감사드리고 싶다. 지금 두 번 이식한지 22년째 남은 삶도 멋지게 건강하게 살아야지 하고 크게 웃으며 오늘도 봉생병원 신장내과 외래로 간다.

 

※ 해당 글은 이동섭 님께 원고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